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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최고령 야구 감독 김응룡

한화 이글스 감독에 전 해태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스에서 감독을 역임하면서 10번의 우승신화를 썼던 김응룡 감독이 선임됐다. 내부 승진이니 외부 영입이니 소문이 무성하더니 뜬금없이 8년 이상 현장에서 떠나있던 김응룡 씨를 감독으로 낙점했다.  김 감독의 감독 복귀를 두고 팬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엇갈린다. 그의 현장 복귀를 환영하는 팬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후배들에게 감독 자리를 열어주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반대의 의견을 보이는 팬들로 나뉜다.  심하게는 70이 넘은 나이에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냐며 못 마땅해 하는 사람도 있는 실정이다. 어쨌든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김응룡 감독이 어떻게 한화 이글스를 이끌어 나갈지를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김 감독은 고향이 평안남도로 6.25 사변 때 부산으로 피난을 온 실향민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 발발로 아버지 손에 끌려 1.4후퇴 때 월남하였고 1954년에 부산 개성중학교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부산상고 졸업 후 당대 최고 팀이었던 농협 팀에 덩치가 너무 커서 둔할 것이라는 이유로 입단이 좌절되자 대한통운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실업야구 최고의 홈런타자로 등극 장종훈, 김현수로 대표되는 연습생 신화의 원조가 된다.  김 감독의 별명이 ‘코끼리’인데 1루수로 활약하던 선수시절 야수들이 던지는 공을 받아내는 모습이 마치 코끼리가 비스킷을 받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리고 팬들이 잘 모르는 또 다른 별명이 백곰이었는데 타석에 들어서서 하는 행동이 백곰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김응룡 하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은 바로 1963년 ‘제 5회 아시아 선수권 야구 대회’ 결승전이다. 본 대회 최다 우승팀인 일본을 3-0으로 격침시켜 한국 야구 사상 처음으로 일본에게 승리를 거둔 시합에서 1회 선취타점, 8회 투런 홈런 등 전타점을 혼자 때려내며 한국야구 역사상 국제대회 처녀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면서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그 후 대한통운이 해체되어 크라운맥주로 바뀌고 다시 한일은행이 크라운 맥주 팀을 인수하는 동안에도 부동의 4번 타자로 활약하게 된다.  그의 나이 32살에 선수 생활을 접고 김영덕 감독의 뒤를 이어 한일은행 감독으로 자리를 바꾸면서 화려하게 데뷔, 한일은행을 실업 최강 팀으로 이끌어 가며 성공가도를 걷게 된다.  그러나 82년 프로야구가 창단되면서 그를 불러주는 팀은 아무데도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그는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떠난다. 그때 만난 사람이 지금 메릴랜드 몽고메리대에서 투수 코치로 활약하고 있는 이덕준 씨다.  그러다 김동엽 감독의 후임으로 한국프로야구의 외인구단이라 불리던 해태 타이거즈를 맡게 된다.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83년 팀을 맡은 지 1년 만에 타이거즈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끄는 쾌거를 이루면서 한국 최고의 명장으로 11번의 한국시리즈 패권을 움켜쥐면서 우승제조 감독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선수들에게는 호랑이 감독으로 통하는 그지만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퇴장도 불사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받은 퇴장명령은 18번으로 이 기록 역시 국내 최고이다. 이제 한 평생 야구를 사랑하며 야구를 위해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을 야구를 사랑하는 팬들을 위해 온힘을 다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할 것을 기대하며 그의 귀환에 박수를 보낸다.

2012-10-11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감독 수난시대와 김시진 감독

요즘 프로야구 감독들이 연이어 경질되는 일이 벌어져 팬들에 큰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 달 한화 이글스 한대화 감독에 이어 넥센 히어로즈의 김시진 감독이 성적부진을 이유로 잔여경기 15 게임을 남겨 놓고 갑자기 옷을 벗었다. 마치 천하를 통일한 유방이 일등공신인 한신을 쫓아내듯이 말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성적 부진이라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넥센은 전반기 들어 팀 순위가 3위까지 올라가면서 파란을 불러일으켰고 유망주들이 꾸준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며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만든 팀이었다. 장기레이스 경험 부족과 얇은 선수층 때문에 리그 후반부터 팀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시즌 마감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감독을 경질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다 쓰러져가는 팀을 절치부심해서 오늘의 넥센을 만들어 놓았는데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적만으로 감독의 자질을 평가하는 구단의 조치는 팬들의 비난을 비껴갈 수 없을 것이다.  한국야구 최고의 투수 조련사로 불리며 현대 유니콘스 왕조를 이끌어낸 공신으로 평가받은 김시진 감독은 공중분해 위기에 처했던 현대의 어려운 사정에도 감독으로서 팀을 맡아 선수단을 잘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2009년 현대 유니콘스가 넥센 히어로즈로 팀이 바뀐 후 감독을 맡았고, 팀 성적은 최 하위권이었고 선수들의 연봉은 바닥까지 내려간 어려운 사정과 타 구단에서 좋은 조건으로 감독으로 오라는 부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같이 했던 선수들을 위해 넥센을 떠나지 않았던 의리의 사나이이기도 했다. 이런 김시진 감독의 갑작스런 경질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아오고 있다. 선수단 분위기가 크게 흔들리고 있음은 물론이고 팬들의 반발 또한 엄청나다.  우선 태평양 돌핀스 시절부터 사제지간으로 절친한 사이인 정민태 투수 코치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사임하겠다고 구단에 통보했다. 김 감독은 현대 유니콘스에서 투수코치로 활동할 때 정민태가 부상에서 재활을 거쳐 최고 투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다해 도와주었던 스승이다. 김성갑 수석코치 역시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라며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돌면서 남은 경기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를 고민했다”고 자신의 찹찹한 심경을 털어 놓았다.  감독대행이라는 호칭을 극구 사양하면서 시즌이 끝나면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상태이다. 선수들 역시 미안한 마음은 같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투수들은 더욱 그러했다. 전날 경기에서 사사구를 무려 13개를 내주며 상대 팀에게 승리를 헌납했기 때문이다.  김 감독과 정 코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사구인데 그것도 무려 13개라는 기록적인 수치로 경기를 내줬기 때문이다.  넥센은 김성갑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선임하며 남은 시즌을 마무리한다고 하지만 김성갑 코치가 흔들리는 선수단의 분위기를 얼마나 잘 수습하며 남은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구단의 임기응변적이고 근시안적인 운영이 한국프로야구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문제점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감독의 권위가 가벼워지면 소신 있게 팀을 이끌어 나가기가 어려워짐은 불을 보는 듯이 자명한 이치이고 나아가 한국야구의 저해요소만 될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정계에서 흔히 일어나던 ‘토사구팽’하는 일들이 야구계에 까지 자리매김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2012-09-27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한용덕 감독 대행 '겸양의 미덕'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팔도 인물에 대한 평을 해보라는 어명을 받고 전국 8도 사람들에 대한 인물평을 했는데 충청도 사람에 대한 평을 이렇게 했다. 청풍명월(淸風明月)이다. 다시 말해 맑은 바람과 큰 달처럼 부드럽고 고매하다고 충청도 사람을 평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충청도 사람을 양반이라고 불렀다. 물론 충청도 사람들 모두가 양반은 아니지만 그들의 성격이 모가 나지 않고 곧은 이유에서 그랬을 것이다.  얼마 전 한대화 감독이 한화 이글스 감독직에서 물러나면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한용덕 감독 대행의 선임 감독에 대해 파격적인 예우를 갖춘 훈훈한 이야기이다. 감독대행을 맡은 후 첫 경기를 치른 한 감독 대행은 경기 내내 서있었다. 이전까지 한대화 감독이 앉아 경기를 지휘하던 의자는 주인이 없이 비어 있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서 있는 한용덕 감독의 이런 모습은 팬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감독이 앉는 의자에 앉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이유는 전 감독에 대한 전관예우의 의미다. 당연히 전 감독을 배려하는 그런 게 있어야 한다. 한 감독은 앞으로 남은 시즌 동안 그 의자에 앉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갑작스럽게 지휘봉을 넘겨받기는 했지만 전 감독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내린 결정이다. 감독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경기 전부터 선수들이 훈련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하루의 삼분의 일을 서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자리다툼을 위해 정도전의 말과 같이 이전투구(泥田鬪狗-진흙 밭에서 개같이 맹렬히 싸움)가 만연한 사회에서 밝은 달빛 아래 맑은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만약에 내년 시즌에 그가 정식으로 한화의 수장이 된다면 김인식 감독의 뒤를 잇는 덕장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한용덕은 충남 대전 출신으로 한대화 감독과 같은 고향 선후배 사이다. 충남중을 거쳐 천안 북일고를 거쳐 동아대에서 1학년 때까지 투수로 활약하다 한국야구의 오랜 병폐인 선배들의 지독한 체벌에 시달리다 야구를 포기하고 트럭운전 기사, 리어커를 끌기도하고 전화기 판매도 해봤다.  그러나 어느 날 프로야구 중계를 보면서 야구에 대한 열정을 다시 찾게 되었고 북일고 은사인 김영덕 감독을 찾아가 야구를 다시 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연습생으로 배팅 볼을 던지며 동료들의 칭찬이 계기가 되어 정식으로 프로야구에 입문하게 된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용덕이 던질 줄 아는 공은 직구 밖에 없었다. 슬라이더를 아무리 던지려 해도 되지 않았는데 하루는 포수 유승안이 슬라이더를 던지라는 사인을 보냈다. 대선배가 내는 사인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눈 딱 감고 던진 것이 제대로 포수 미트에 꽂혔고 다음 투구도 슬라이더 사인을 내는 바람에 다시 한 번 시도한 것이 정확히 미트에 들어가면서 슬라이더를 깨우치면서 은퇴할 때까지 써먹게 되는 구질이 되었다.  서서히 한용덕의 시대가 열리는가 싶었는데 가족 모두가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교통사고로 인해 다시 한 번 고비를 겪는다. 본인도 왼쪽 팔을 다쳐 거의 사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지만 은퇴할 때까지 장애를 감추고 슬렁슬렁 던진다는 오해를 받으면서 투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바닥까지 가봤기 때문에 선수들의 어려움을 품을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성격과 인생 경험이 그가 프로야구 레전드로 꼽히는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2012-09-13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쓸쓸한 '야왕(野王)'

한화 한대화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잔여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이글스를 떠났다. 한밭 대전에서 나고 자란 그는 현역시절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고향 팀의 사령탑을 맡으면서 오랜 소원을 이루는가 싶었는데 결국 한화와 작별을 고했다.  한대화 감독이 삼성 수석코치 자리를 뒤로한 채 하위권에 머물던 한화로 자리를 옮길 때 주변 사람들의 많은 염려가 있었다. 과연 어느 정도로 팀을 상위권으로 끌어 올릴 수 있을지를 말이다.  3년이라는 시간이 그에게 주어졌다. 구단에서도 전폭적인 지원 사격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어려움이 겹치기 시작했다. 김태균과 이범호 등 간판타자 두 명을 일본으로 빼앗기면서 타격의 축이 흔들리게 되었다.  한화는 한 감독이 부임한 2010년 8위, 지난해에는 공동 6위를 했다. 올 시즌에는 박찬호, 김태균을 일본에서 불러왔지만 시즌 초반부터 기대 이하의 경기력으로 최하위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모든 책임을 한 감독 혼자 짊어지고 떠났다. 수장의 자리라는 것이 이렇듯 어려운 자리인 것이다. 잘하면 그 영광이 선수에게 돌아가지만 못하면 모든 책임이 감독 탓으로 돌아가고 만다. 온갖 스트레스는 혼자 받으면서 말이다. 맨 처음에는 관중들에게 다음에는 매스컴에게 두들겨 맞는다. 세상에 어느 감독이 게임에 지고 싶겠는가?  야구공이 둥글 듯이 시합이라는 것은 뚜껑을 열어 보기 전에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만 가지고 판단하려고 하는 우를 범한다. 물론 선수들이 수준이하의 경기를 펼쳤을 경우에는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아무리 훈련이 잘된 선수나 감독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게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팬들이나 구단 관계자들도 헤아려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점에 있어서 선수들 각자가 자책을 하면서 갑작스런 감독 경질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스포츠맨십이며 이러한 태도가 오늘의 자신들이 있게 한 선배나 자기들을 지도하는 지도자들에게 나타내는 예우가 아닐까 싶다.  한대화 감독은 그들에겐 영웅이자 우상이었던 인물이다. 한국 야구 역사상 최초로 세계를 제패했던 1982년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숙적 일본을 상대로 우승을 결정지은 3점 홈런, 그 3점 홈런의 주인공이자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3루수로 선정된 선수가 바로 그였다.  그런 그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바로 간염이라는 고질적 원흉이었다. 연고지 OB 베어스에 입단을 하게 됐는데 혹독한 훈련으로 악명이 높은 김성근 코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항상 피로감을 달고 살아야하는 그가 훈련에 불성실한 것으로 비춰져서 결국 해태로 트레이드를 당하게 된다. 해태로 이적한 그에게 김응룡 감독은 적당한 훈련을 하도록 배려를 나타내 준다.  이러한 감독의 배려에 보은을 하듯이 승승장구하면서 팀이 한국시리즈 7연패를 달성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며 88년 올스타전 MVP의 영예도 함께하는 명실상부한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3루수로 프로야구사에 한 획을 긋는 전설이 되었다.  비록 감독으로서 화려한 경력은 못 올렸지만 많은 일화를 남기며 그라운드를 누볐던 선수로 기억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라운드에 설날을 기다리며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2012-08-30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프로야구와 '꿈나무'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 성화도 꺼지고 모든 스포츠 경기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한국은 종합 5위로 역대 최고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하는 쾌거를 올렸다. 80년대 초 올림픽 ‘꿈나무’를 키우자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그 꿈나무들이 훌륭하게 성장해서 세계정상에 오르며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한국 스포츠의 위상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한국야구도 같은 시기에 프로야구가 창단되면서 야구 꿈나무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지금 활동하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80년대 활약하던 스타플레이어들을 롤 모델(Role Model)로 삼아 자신들의 원대한 꿈을 키워왔을 것이다.  투수라면 불사조 박철순, 무쇠팔 최동원, 김시진,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 선수를 타자라면 헐크 이만수, 김우열, 안타제조기 장효조 그리고 유격수라면 김재박을 자신의 이상형이나 우상으로 삼으며 야구선수의 길을 걸어왔다.  역할 모델(Role model)은 어떤 한 사람을 정해, 그 사람을 표본으로 정하여 성숙할 때까지 모델로 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어린 선수들에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그의 인생행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어린선수들은 감수성이 예민해서 유명선수들이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라하려고 한다. 그가 사용하는 상표의 글러브나 배트는 기본이고 그가 경기 중에 하는 이상한 버릇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따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같이 가지고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같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점은 칭찬할 일이지만 본인의 체격조건이나 기량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의 포지션만 고집할 경우 성공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은 투수가 되고 싶은데 자질이 부족하다면 빨리 타자로 전향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훌륭한 선수라고 무조건 따라 해서는 안 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 선수와 자신은 체격 조건이 그리고 그 선수도 약점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자칫 나에게도 약점으로 작용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자라나는 꿈나무나 꿈나무를 지원하는 부모들이 감안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매년 칼 립켄 월드시리즈를 취재하며 일본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면서 느끼는 점인데 기본기가 한국 팀을 앞선다는 점이다. 이점은 일본팀이 실책이 별로 없다는 점으로 증명이 되고 타격에서도 정확하게 공을 쳐 낼 줄 알고 찬스에 강할 뿐 아니라 웬만해서 찬스를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 본받을만하다. 그리고 위기대처 능력이 우리를 앞서간다. 물론 두터운 선수층과 후원 또한 한국을 앞서가는 점은 사실이다.  1만5000개 팀에서 선발된 일본대표와 24개 팀에서 그것도 미국여행을 자비로 할 수 있는 경제적 뒷받침이 되는 선수들이 참가하고 실력은 있지만 선수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좋은 선수들이 선발되지 못한다는 점이 한국이 우승을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도 올해는 준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예선과 결승에서 일본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쉬움을 뒤로한 체 내년을 기약해야만 했다. 큰 규모의 국제대회는 아니지만 코리아라고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미래에 한국야구를 이끌며 한국프로야구뿐만 아니라 세계무대에서 활약을 펼칠 어린 꿈나무들에 대한 지원이 너무 소홀한 듯한 기분이 들어 아쉬움이 남는 대회였다.

2012-08-23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프로야구' 와 재벌 그룹의 홍보효과

2012년 올림픽 남자 체조 양학선 선수가 도마경기에서 난이도 7.4인 경이적인 동작으로 전 세계를 흥분시키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자신의 영광은 물론 나라의 명예를 전 세계인들에게 깊이 새기는 엄청난 공을 세웠다.  이튿날 아침 미국인 직장동료들에게 내가 축하를 받으며 양학선 선수의 경기 모습에 “어메이징(Amazing)”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경의를 표한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솔직히 미국인들은 십중팔구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잘 모른다. 심지어 어디에 위치한 나라인지도 잘 모르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박세리나 김연아의 이름이나 박찬호, 추신수 등 유명한 운동선수의 이름을 언급하면 이들이 코리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정도이다.  이토록 스포츠 선수나 유명 연예인들이 국위를 선양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래서 세계 각 나라는 스포츠를 통한 외교에 힘쓰는 것이다. 그 중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종목이 야구이다.  전 세계 프로야구 선수들을 기량을 겨루기 위해 2006년 창설된 국제대회인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비롯해서 세계아마추어야구선수권대회, 대륙간 컵, 아시안 컵 등. 국가 상호간 경쟁을 펼치는 굵직한 대회들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자신의 기업이나 그룹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프로야구팀이 운영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대만이 그 좋은 예이다.  82년 한국프로야구가 탄생할 당시 MBC 문화방송이 모체인 MBC 청룡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팀들은 자사그룹이나 기업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단했다.  그중에 자사 그룹을 홍보를 목적으로 한 팀은 삼성 라이온스와 삼미 슈퍼 스타스 그리고 자사 제품 홍보를 위한 팀으로는 롯데 자이언츠, 해태 타이거스, 그리고 OB 맥주를 생산하는 OB 베어스가 창단 되었던 것이다.  사실 숫자상으로 계산해보면 전문경영인이 아니더라도 구단 모두 적자운영이라는 점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프로야구 팀을 운영해 왔는가? 이해가 잘 안 갈수도 있다.  구단주가 야구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재벌그룹사간의 자존심 경쟁도 한 몫을 한다. 현대 유니콘스는 정주영 회장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정주영 회장은 현대가 프로야구 출범 당시 야구단을 창단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정주영 회장이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되자 “평생소원을 풀었다”고 만세를 부른 일은 그가 얼마나 프로야구팀을 갖고 싶어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재정적자는 그룹홍보차원에서 볼 때 TV 광고보다 훨씬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팀이 웬만한 적자가 나더라도 그것을 감수하면서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  마치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자국의 인지도를 높이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재계순위 다툼, 맥주회사들의 판매경쟁, 과자회사들의 프로야구를 이용한 마케팅 전략, TV 방송 중계료 등이 프로야구를 계속 이끌어 나가는 각 구단의 존재 가치의 이유인 것이다. 야구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과 더불어 말이다.

2012-08-09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꿈의 제전' 프로야구 올스타전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지난 21일 대전 한밭구장에서 열렸다.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선수들이 팬들의 인기투표로 뽑혀 전기리그를 마친 후에 자신들을 성원해준 팬들에게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어서 경기를 치르며 즐거움을 선사하는 야구 대잔치다.  홈런레이스를 비롯해서 올스타 선수 중 가장 정교한 번트 실력을 겨루는 ‘남자라면 번트 왕’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와 즉석사진 찍기 등, 말 그대로 자기가 투표한 선수들과 즐거움을 함께하는 팬들의, 팬들을 위한, 팬들에 의한 축제다.  그리고 이 날 행사를 통해 접수되는 기부금은 어려운 계층의 다문화가정을 위해 전달하는 따뜻한 정이 담긴 행사이기도 했다. 지금 런던에서 치러지고 있는 ‘세계인의 축제’라는 올림픽과는 많은 대조를 이룬다.  선수는 물론 심판들까지 잘못된 애국심과 상업주의로 얼룩져 자국의 승리를 위해 공정한 판정과 대회운영을 무시하는 태도가 스포츠맨십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던 올림픽에서 오심과 부정행위가 속출하는 잔치로 전락시킨 것과는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그것도 신사의 나라라고 자처하는 영국에서 말이다. 영국이 야구를 하지 않는 이유가 재미있다. 인간이 심판을 보기 때문에 판정에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루가 비신사적이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신사도를 중시하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올림픽에서 비신사적인 오심 판정의 난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프로야구 선수들은 스포츠맨다운 행동을 보여줬다.  얼마 전 10구단 창단이 무산되자 선수협회에서는 올스타전과 WBC(세계야구월드컵) 보이콧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내세우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열광적인 성원을 보낸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올스타전에 임했다.  선수나 팬들을 고려하지 않고 구단의 손익만 생각하는 기존구단을 상대로 벌였던 실력 행사도 팬들의 열렬한 성원을 등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수들이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했다면 올스타전과 WBC 불참을 고집했겠지만 그들은 팬들을 먼저 고려했고 훌륭한 경기를 펼쳐 그동안 팬들이 자신들에게 보내준 아낌없는 사랑과 성원에 보답했다. 물론 롯데를 사랑하는 극성팬들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로 인해 롯데 선수들이 투수를 제외한 동군 라인업 포지션 모두를 차지한 것이 조금은 애석한 부분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감안해서 투수들도 투구회수를 정해 던지도록 할 뿐 아니라 감독도 선수들에게 사인을 내지 않고 선수들이 자율적으로 본인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해서 재미있는 경기를 팬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80년대 올스타전에서는 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마련으로 올스타 출전선수들과 연예인들이 함께 방송에 출연해 장기자랑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마련하는 전야제가 있었고 개막식에도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해 축하공연을 펼쳐 올스타전의 열기를 북돋았다.  어느덧 30년 세월이 흘러 올스타전 출전 선수나 출연했던 연예인들도 이제 모두 중년이 되었다. 올스타전 소식을 접할 때 마다 그 때를 돌아보며 현장에서 그들과 같이했던 추억에 젖어본다.

2012-08-02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돌 직구' 사나이 황규봉 투수

임신근, 남우식, 이선희와 함께 경북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규봉. 이들 네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올드 야구팬들은 가슴이 뛴다. 7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야구의 보배같은 존재들이다.  야구계의 제갈량으로 불리었던 대구 야구의 대부 서영무 감독의 제자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 모두가 혹사로 인한 부상으로 기량을 제대로 발휘를 못하고 마운드를 떠났다는 점이다. 이것이 70년대 한국 야구의 병폐였고 8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당시 투수들은 전국대회에서 북 치고 장구치는 원맨쇼를 하다시피 하면서 우승기와 트로피를 따냈다.  짝배기(왼손 투수를 일컫는 속어) 이선희와 번갈아 가며 마운드를 지키면서 72년 대통령배, 화랑대기, 우수고교초청경기에서 경북고를 우승시킨 투수가 바로 ‘돌 직구’ 황규봉이다. 동기인 이선희는 이때만 해도 황규봉의 뒤를 받쳐주던 릴리프 투수였다. 경북고 시절의 에이스는 누가 뭐래도 황규봉이었다.  고교 최고투수였던 그는 고려대로 진학했고 대학 1학년 시절부터 국가대표 에이스로 선발될 만큼 장래가 촉망되는 투수였다. 탄탄대로를 걷던 그에게 불행이 닥치기 시작한 것은 약관 20세에 태극마크를 달고 참가했던 73년 필리핀 아시아선수권대회였다.  대표팀이 묵고 있던 마닐라 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다른 선수들은 일찍 대피했지만 황규봉은 미처 피하지를 못했다. 3층에서 뛰어내린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허리 부상을 입는 불상사를 겪었다.  이때 겪은 고소공포증에 협심증, 극도의 정신불안으로 1년 반 투병생활을 했다. 황규봉은 2년 뒤에 다시 공을 잡았고 4학년 무렵에는 고대 에이스와 국가대표로 복귀하며 재기했다. 대학 졸업후 김재박, 정순명과 함께 신생 팀 한국화장품 창단 멤버가 됐다. 시즌 중반에 20승을 올리며 최고의 투수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때 황규봉의 구위에 눌린 타자들이 그의 투구에 ‘돌 직구’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하지만 그에게 불행의 먹구름이 다시 한 번 찾아왔다. 일본행 비행기 안에서 고소공포증이 재발해 그는 한 동안 선수생활을 접고 휴양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야구에 대한 그의 열정과 불굴의 정신은 그를 마운드로 다시 돌아오게 했다. 세번째 국가대표 유니폼도 함께 입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가리켜 ‘원조 불사조’라고 부른다.  프로야구 첫해 15승11패 방어율 2.47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올린 그는 다승공동 2위와 12세이브로 구원투수 1위에 차지하며 프로 최초 최우수 구원투수상을 받았다. ‘돌 직구’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시즌 첫해 200회 이상을 던지는 무리한 등판으로 이듬해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오뚝이 같이 다시 일어나 84년 젊은 투수들도 쉽게 해내지 못하는 10승2패(승률 1위), 85년 14승7패의 성적을 올리면서 삼성 라이온스가 첫 우승을 하는 데 트로이카였던 김시진, 김일륭과 함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선수 수명으로 치면 환갑이 넘은 할아버지가 불굴의 4전5기(四顚五起) 정신으로 역경을 이겨내면서 마운드를 굳게 지켜 젊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됐다.  5년이라는 짧은 선수생활이었지만 황규봉이라는 훌륭한 선배 투수가 보여준 불굴의 투지와 정신은 조카나 자식 같은 후배들에게 커다란 교훈과 희망이 됐다.

2012-07-19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꽃미남' 투수 문희수의 짧았던 투수인생 ①

1980년대 해태 우승에 한몫을 한 선수 중에 ‘꽃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선수가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한창 피어나는 예쁜 처녀와 같은 외모를 지닌 문희수라는 투수가 그 주인공이다. 선동렬의 광주일고 3년 후배로 83년 대통령배 우승을 포함 광주일고를 전국대회 3관왕으로 이끌며 최초로 고교 졸업 후 프로에 진출한 선수다. 문희수는 1985년 12승을 올리는 등 1995년까지 통산 59승49패13세이브,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곧 바로 연고지인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그의 광주일고 선배인 이상윤과 선동렬의 뒤를 있는 3선발로 자리를 굳히기 시작하면서 144이닝을 던지면서 12승8패라는 성적으로 성공적으로 프로에 데뷔하게 된다. 특히 김응룡 감독의 문희수에게 거는 기대는 보통 이상이었다. 문희수가 일찍이 부상으로 인해 마운드를 떠나게 되자 가장 안타까워하면서 “매우 아까운 선수”라고 항상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정과 의리의 사나이’답게 문희수를 투수 코치로 자기 측근에 두고 끝까지 챙겨줬다. 이런 김 감독의 배려에 그는 훌륭한 피칭으로 보답했다. 특히 1988 한국 시리즈 6차전에 등판한 문희수는 게임을 승리로 이끌면서 우승 트로피를 선물했고 자신은 한국시리즈 MVP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잘나가던 그에게 불행이 찾아온다. 체중이 가벼워서 볼도 가벼웠기 때문에 김응룡 감독은 문희수에게 체중을 불리라는 엄명을 내린다. 이것이 그에게 선수 생활에 치명적인 요인이 될 줄을 누가 짐작인들 했겠는가? 그 때부터 문희수는 “매일 저녁식사때면 한 양푼씩 밥을 먹었다”고 했다. 이렇게 체중이 불리는데 성공을 했는데 체중이 불어나면서 그에게는 ‘꽃 돼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작고한 이종남 기자가 붙여준 별명이다.  이런 상태에서 갑작스런 운동을 하게 되자 무릎 관절에 무리가 왔던 것이다. 89년 동계훈련을 시작할 무렵 그는 무릎 통증을 호소하면서 주치의를 찾아가 상담을 하기에 이른다. 검사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 요즘 같이 스포츠 의학이 발달되지 못한 시기였던 때라 다른 치료 방법을 시도해 보기도 전에 무릎 수술을 단행했다. 이것이 문희수에게 커다란 악재로 다가왔다. 이유야 어찌됐든 문희수는 수술시기를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1989년 시즌을 시작으로 내리막길을 걷는다. 다른 어느 포지션보다 하체의 힘을 많이 받아야 하는 투수가 무릎 관절에 이상이 생겼다면 투수에겐 선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좋은 자질을 갖춘 투수 한 명이 낙후했던 당시의 의료기술로 인해 선수생활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어느 정도로 낙후했었는가 하면 게임하다 타자가 투수의 공이나 자신의 파울 타구에 맞게 되면 트레이너는 뿌리는 물파스 하나만 달랑들고 그라운드로 향한 다음 골절유무만 확인하고 타박상이면 스프레이만 뿌려주고 들어올 정도였다. 더욱 한심했던 것은 구장 내에 응급처치 장비나 시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것이 프로야구 초창기의 실태였던 것이다.

2012-07-05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에러(Error)왕' 유지훤

야구는 기록의 경기다. 대부분 좋은 기록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두고두고 화제의 꽃이 되지만 나쁜 기록들은 당시에만 화제가 될뿐 사람들의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게 마련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수비 실책(Error)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과연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실책왕은 누구일까? 궁금해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OB 베어스에서 유격수로 활약했던 유지훤 현 한화코치이다. 올해 들어 제일 많은 수비 실책을 기록한 선수는 LG 트윈스의 오지환 선수이다. 현재까지 경기당 0.27개의 실책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상태로 남은 경기를 모두 뛴다면 약 35개의 에러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1986년 OB 베어스에서 유격수로 뛰었던 유지훤 한화코치가 83년에 기록해 27년 간 깨어지지 않은 31개를 능가하는 한 시즌 최다 실책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우게 된다.  유지훤은 이름과는 다르게 훤칠한 키가 아닌 아주 작달막한 선수였다. 선배 김우열, 박상렬과 함께 오비의 구레나룻 삼인방으로도 잘 알려진 선수기도 하다. 2루수 김광수와 콤비를 이루며 작은 체구를 가지고 OB 내야진을 책임졌던 선수였다. 그는 소년시절 박철순, 김용희, 김용철, 하기룡과 함께 같이 야구를 시작했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대광 고등학교 야구부가 생겨 서울로 짐을 싸 올라와 김재박의 직속 후배로 73년 황금사자기 8강까지 진출하면서 중앙무대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상업은행을 거쳐 82년 OB 베어스가 창단될 때 프로에 입문하게 된다.  데뷔 첫해 우승 멤버가 되는데 한국시리즈 마지막 게임에서 박철순 투수가 던진 마지막 타구를 처리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뒷문 단속을 말끔하게 해서 어릴 적 친구를 위해 한국시리즈 우승투수가 되는 영광의 선물을 안겨준 의리의 사나이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실책으로 다잡았던 한국시리즈 진출을 해태에게 상납했던 아픈 과거도 함께 지닌 사나이기도 하다. 1987년 해태 타이거즈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9회말 투아웃에서 결정적인 에러를 범하면서 어이없는 동점을 허용한다. 결국 베어스는 해태 킬러 최일언의 끝내기 폭투로 타이거즈에게 5차전에서 패하면서 한국 시리즈 진출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 때 순간을 김성한 선수의 말을 통해 들어보면 이렇다. “그날 앞선 4타석에서 안타를 뽑지 못했어요. 당시 최일언은 해태 킬러였는데 특히 인코스 볼이 위력적이었죠. 볼카운트 1-1에서 3구째도 몸쪽으로 들어오더라고요. 그런데 빗맞았어요. 치는 순간 죽었구나, 졌구나! 하는 생각밖에 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이때, 유지훤이 타구 바운드를 맞추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면서 공을 잡으면서 1루에 던졌는데 그 때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리던 내가 아슬아슬하게 1루를 먼저 밟았던 거예요. 살아야겠다고 뛴 게 아니라 시즌을 마치는 마지막 타석이라 열심히 뛴 것이 우연히 살았던 거죠.”  유지훤에게 1987년은 악몽의 한 해였다. 또 다른 최악의 대기록을 세우게 되는데 최다 연타석 무안타 기록을 세운 것이다. 무려 47 연타석 무안타를 기록한 것이 공식 기록으로 남아있다. 열두 게임 동안 한 개의 안타도 때리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 기록 역시 깨어지지 않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록 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의 타순은 8번 아니면 9번 등 매번 하위타순에 배정되는 게 일상사였다. 하지만 뛰어난 수비는 아니었지만 몸을 사리지 않고 수비를 하는 성실한 자세로 OB 유격수 계보의 시금석이 된 인물이었다. 실제 OB 베어스의 유격수는 공격보다는 수비가 더 강한 것이 지금까지 전통으로 내려온다.  1989년 6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치고 OB에 남아 후배들에게 뼈아픈 실수를 하는 선수가 되지 않고 훌륭한 내야수가 되는 노하우를 지도하는 코치로 새로운 야구인생을 시작한다. 비록 수치스러운 기록의 소유자지만 몸을 날려가면서 까지 투지를 보이며 그만이 가지고 있는 성실함이 유지훤을 장수하는 지도자로 살아 갈 수 있게 했다고 본다.

2012-06-28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용병 아닌 용병' 재일동포 투수들

요즈음 한국프로야구에서 뛰는 용병선수들의 활약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용병타자는 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몇 명 남아있는 투수들의 활약도 이 전만 못하다.  이제는 재일동포 출신 선수들보다 외국인 용병 선수들이 대세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많이 성장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아마추어 수준과 같았던 한국프로야구의 진흥과 발전을 위해 제일동포 선수들을 국내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 첫 단추를 낀 선수가 삼미의 투수는 장명부, 타자는 이영구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난카이 호크스, 히로시마 카프스에서 2년 연속 우승의 주역이었던 장명부의 활약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60경기에 등판하여 36번 완투를 하면서 30승을 올리며 아직도 깨지 않은 대기록을 세웠다. 그 당시 60경기 출장이라는 숫자는 투수에게는 거의 전 경기에 뛰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세계 어디를 찾아보아도 이런 기록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해태에는 주동식 투수와 김무종 포수가 등장하게 된다. 이 때 주동식의 나이가 35살이었다. 그 당시 김응룡 감독을 제외하고 팀 내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선수였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일본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니혼햄)와 한신 타이거스에서 11년 동안 중간계투 투수로 뛰며 통산 16승 19패 평균자책점 3.97의 성적을 남겼다. 한국에서의 기록은 2년간 해태 유니폼을 입고 통산 13승12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2.94를 기록했다. 물론 장명부나 삼성의 김일륭에 비해 성적이 많이 떨어졌었다.  그러나 83년 후기 리그 우승팀인 MBC 청룡과 가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2승을 건지며 우승트로피를 해태가 품게 한 일등공신이다.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동식이 고국 땅을 밟은 이유는 “너는 반드시 한국에 가서 야구를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소원 때문이었다. 이들 재일동포 선수들이 아버지의 나라를 찾아오게 된 대부분의 이유는 주동식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으로 삶의 터를 옮겼을 때 정작 어려웠던 건 언어문제보다 일본과 다른 야구문화와 또 다른 차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팬들은 물론 동료선수들도 반 쪽발이라고 멸시하는 태도가 이들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며 선수 생활을 하는 데 많은 장애물이 되었다.  마치 지금의 다문화 가정이 겪는 설움과 같았다. 주동식이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을 김응룡 감독으로 꼽는다. 김 감독과 말다툼한 기억이 많았다고 선수시절을 회상했다. “선수기용이라든가 야구스타일이 일본과는 많이 달랐다. 특히 투수교체 타이밍 때문에 실랑이를 자주 벌였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투수를 바꾸려고 마운드에 올라간 김응룡 감독에게 공을 주지 않고 화가 난 얼굴로 포수 쪽으로 집어던져 김 감독을 당황하게 만든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김응룡 감독에게 이렇게 대항하던 선수는 아마 그가 유일무이 할 것이다.  한국야구가 오늘과 같이 세계적으로 성장하는데 이들 재일동포 선수들의 동족의 차별과 낯선 고국의 이질적인 야구문화를 감수해 내면서 한국야구 발전에 기여한 그들의 업적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2012-06-21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스스로 호랑이가 된 사자' 서정환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서 난 새끼를 라이거라고 부른다. 호랑이와 사자의 피가 반반씩 섞이긴 했어도 그 용맹성은 어디로 가겠는가?  이와 비슷한 상황이 83년 쓸만한 유격수가 절실히 필요했던 해태 타이거즈가 현금을 주고 삼성 라이온스 소속이었던 서정환을 트레이드하며 벌어졌다. 당시 삼성 라이온스에 유격수로 창단 멤버가 된 서정환은 천보성, 오대석, 장태수 같은 쟁쟁한 유격수가 즐비한 삼성에서는 주전으로 출전하기 힘들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경북고 은사이면서 당시 삼성 라이온스 감독이었던 서영무 감독을 찾아가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를 해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물론 서정환도 국가대표 출신이지만 이들보다는 공격력이 떨어지는 게 문제였다. 제자의 장래를 생각한 서영무 감독은 그를 해태로 트레이드를 시켜줬다. 겨우 1600만원에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됐다. 프로야구사상 첫 트레이드였다. 서정환은 자신을 해태로 보내준 고 서영무 감독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실제로 삼성과 경기할 때마다 서 감독을 찾아가 인사를 하며 예를 갖췄다. 사자가 호랑이 굴을 찾아가 스스로 호랑이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정환의 저주’가 시작됐다. 서정환을 싼값에 트레이드한 삼성 라이온즈는 이후 한국시리즈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고, 해태타이거즈는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서정환은 유격수로서 빼어난 수비와 필요로 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알찬 공격력을 발휘해 다섯 차례나 해태 우승에 톡톡히 기여를 하면서 해태 맨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같이 서정환은 견실한 수비와 빠른 발을 이용한 플레이로 1980년대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86년에는 43번이나 2루를 훔치면서 도루왕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선수 대부분이 군산상고-광주일고 동문으로 구단 분위기가 이루어져서 지역 색이 상당히 강했던 팀인 해태에서 대구출신으로 선수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으로 봐서는 친화력이나 적응력이 매우 뛰어났던 선수였다. 양준혁, 손혁, 최원호 등은 해태에 트레이드되자 이를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이 갈 정도로 타지역 출신이 적응하기 어려운 팀으로 알려져 있는 팀이 바로 해태이기 때문이다.  서정환은 해태 유니폼으로 새롭게 갈아입고 ‘꽃미남’ 2루수로 여성 팬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차영화와 함께 멋진 키스톤 콤비를 이뤘고, 87년 백인호가 입단하자 유격수 자리에서 밀려나 주로 2루수 차영화의 백업 선수로 출전하게 된다.  그는 굉장히 마른 체형으로 김응룡 감독 이하 당대의 해태 선수 치고는 왜소한 체격으로 전 경기를 소화할만한 체력이 되지 못해 힘들게 선수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 그가 1988년에 딱 한번 3할을 치게 되는데 이 때 홈런 개수가 하나도 없는 무홈런 3할 타자가 된다. 장타 보다는 단타 위주의 타격으로 이루어낸 성적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가를 잘 파악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핸디캡을 하나씩 풀어나간 몇 안 되는 선수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한 그의 성실함이 인정을 받아 고향 팀 삼성 라이온스 감독을 역임하고 얼마 후 제2의 고향 팀인 기아 타이거즈 감독의 자리에 올라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성적부진으로 인해 감독생활은 오래 하지 못했다. 지금은 야구해설자로 팬들과 같이하면서 한편으로 야구 꿈나무를 찾아 육성하기 위해 폐교 위기에 처한 경기도 여주에 있는 송삼초등학교 리틀야구단 총감독을 맡아 자신이 아는 야구기술과 함께 삶의 철학을 모두 전수할 예정이다.

2012-06-14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개막전 무 삼진 노히트노런' 주인공 장호연 ②

장호연의 투구 폼을 보면 항상 찡그린 얼굴이다. 혼신의 힘으로 던지는 것 같이 보이는 볼 스피드는 프로야구 투수 중 최하위권이다. 장호연은 유명한 야구해설가들조차 그가 던지는 구질조차 파악할 수 없고 이름도 붙일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야구만화에나 나올 법한 기괴한 변화구를 던질 수 있었고 마치 타자에게 배팅 볼이라도 던져주는 듯한 느낌으로 타자들을 상대했다. 어떨 때는 시속 100킬로미터 속도로, 어떨 때는 130킬로미터 구속으로 공을 던져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는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피칭으로 타자들을 요리했다.  그는 다른 투수들에 비해 손가락이 짧았던 탓에 제대로 된 변화구를 구사하기 힘들었다. 이 때문에 다양한 변칙 구종을 연구하고 실전에서 변화구를 만들어 던지기도 했다. 장호연 표 변화구인 셈이다.  그렇게 온갖 공을 던지며 타자와의 수 싸움에서 이기면 특유의 야릇한 미소를 보이며 타자들의 속을 뒤집어 놓는 피칭으로 유명했다.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보였는데, 그 웃는 표정과 중국사람 이름 같은 이름이 주는 뉘앙스 때문에 ‘짱꼴라’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뿐 아니라 매년 연봉 협상 테이블에서도 구단과 의견이 조율되지 않아 동계훈련에 불참하는 일도 빈번했다. 선수들에게 있어서 동계훈련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다음 시즌을 위한 체력을 다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게 동계훈련이다. 그러나 동계훈련에 참가하지 못한 그는 스키를 타러 스위스로 날아가곤 했다. 나름대로 하체강화와 유연성을 기르기 위한 자신만의 훈련 방법이었다. 물론 다른 선수들은 부상을 염려해 금기시 됐던 운동 중 하나였지만 그는 과감하게 그 방법을 택했다.  장호연은 프로야구 초창기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들을 그는 곧 잘 벌였다. 한 번은 오프 시즌 중 벤츠를 타고 동료 및 감독과 코치 앞에 나타났다. 구단에서 난리가 났다. 그때만 하더라도 재벌그룹 총수들이나 타고 다닐 법한 외제차를 그것도 최고급 승용차라고하는 벤츠를 끌고 구장에 나타났으니 온통 난리가 났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장호연은 당당하게 “프로선수는 몸이 재산인데, 내 몸을 내가 보호하지도 못하는 게 말이 되냐”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지금이야 선수들이 외제차를 타는 것이 별일이 아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대단한 돌출 행동이었다.  이렇게 장호연은 자신만의 세계를 확실히 갖고 있는 선수였다. 나쁘게 보면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선수이고 좋게 말하면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선수였다는 엇갈린 평을 받는 선수였다.  물론 사람마다 그를 평가하는 기준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교시절부터 학교를 대구상고에서 충암고로 옮겨 가면서까지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는 배짱과 결단력을 보인 선수였다.  학교를 옮긴 이유는 이렇다. 당시 대구상고에는 2년 선배로 김시진이 버티고 있었고, 1년 위엔 박영진이 있었다. 양일환이 동기생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구상고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해 스스로 학교 측에 전학을 요청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박철순, 계형철, 윤석환, 최일언, 김진욱 등 기라성 같은 선후배들이 진을 치고 피가 마르는 듯한 경쟁을 펼치는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변의 비난을 감수했다. 소신껏 마운드를 지키면서 평생에 한번 이룰까 말까한 노히트노런까지 이루며 13년 동안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통산 109승을 올린 그는 95년 OB 베어스 우승에 기여하면서 영원한 OB맨으로 팬들의 곁을 떠났다. 후배들에게 자기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교훈으로 남기면서 말이다.

2012-06-07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개막전 무 삼진 노히트노런' 주인공 장호연 ①

지혜로 유명한 왕 솔로몬이 남긴 교훈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빠른 경주자라고 결승선에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고 힘 있는 자라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우연이 맞아 떨어져야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야구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이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나 싶다. 투수가 1점도 내주지 않고 완봉승을 해도 대단한 경기를 치른 것인데 하물며 28번이나 타자와 맞서서 1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는 점이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야구는 기록의 경기다. 그래서 선수들의 타격과 투구 내용은 물론 야수들의 수비 내용까지 세밀하게 기록으로 남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타자들의 타율에 대한 기록이다. 세 번 나와서 1개의 안타만 쳐도 3할 타자라고 타격이 좋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선수들도 네 번 나와 1개의 안타를 친다. 이 정도만 쳐도 쫓겨나지 않고 수비만 잘하면 주전 자리는 버텨나갈 수 있는데 네 번씩이나 타석에 들어서서 하나의 안타도 못 뽑아내고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선수 모두에게 엄청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상대 투수가 엄청난 위력으로 타자들을 제압했다면 핑계거리라도 삼아볼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한 투수에게 당하는 날에는 보통 창피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일이 1988년 시즌 개막전에서 나오는 희귀한 일이 벌어졌다. 그 장본인이 장호연이다.  그대 4월2일은 OB 베어스가 부산 사직구장에서 롯데와 개막전을 치르며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OB의 선발 투수는 지금 LG 트윈스 감독을 맡고 있는 김진욱 감독으로 내정돼 었었다. 그러나 경기 당일 연습 때 김광림의 타구에 급소를 맞고 응급실로 실려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고민 끝에 김성근 감독은 김진욱을 대신할 선발투수로 낙점한 것은 장호연이었다. 치밀하기로 소문난 김성근 감독의 투수 선발에 모두가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전년 연봉 싸움으로 동계훈련에 늦게 합류해서 제대로 몸도 만들지 못한 장호연을 개막전 투수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투수 본인에게는 개막전 투수가 돼서 승리 투수가 되면 굉장한 영광이지만 패전 투수가 되면 체면이 말이 아닌 게 개막전 투수의 명암이다. 개막전이라고 하지만 그 한 경기 때문에 시즌 첫 주의 선발 로테이션을 한꺼번에 허물 수 없었던 김성근 감독은 개막전 승리를 포기하고 마지막 패로 장호연을 마운드에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의외였다.  시속 120킬로미터를 전후로 해서 던지는 장호연의 공에 공포의 롯데 타선이 픽픽 나가 떨어져 삼진 하나 없이 ‘개막전 노히트노런’이라는 초유의 기록을 장호연에게 갖다바치면서 어이없이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단 99개의 공으로 말이다.  만약 OB 내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졌던 김진욱이 선발로 나갔다면 이 기록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개막전을 승리로 장식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비록 빠른 공은 아니었지만 변화구와 배짱으로 당시 김용희, 김용철 등 공포의 타선으로 중무장한 롯데 타선을 상대로 따낸 값진 승리였다. 이 경기 이후로 그는 ‘개막전 사나이’로 불리며 8차례나 개막전 투수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래서 사람의 일이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뿐더러 솔로몬의 말처럼 재주 많고 힘만 있다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장호연이 기록한 노히트노런 경기를 추억해 보면서 깨닫는다.

2012-05-31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영원한 3할타자' 윤덕규

윤덕규는 대광고를 나와 MBC 청룡과 LG 트윈스에서 박흥식, 김상훈과 함께 짝빼기(야구선수들이 왼손잡이를 일컫는 속어) 클린업 트리오를 이루면서 LG 트윈스의 전성기를 이루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타자였다.  대광고 재학 시절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신인 중 한 명으로 드래프트 명단에도 5번째로 올랐을 정도였다. 그러나 명문대 출신이 즐비한 프로야구계에서 고교 졸업생 타자로서 대단히 성공한 선수였다.  그가 청룡에 입단할 당시 백인천, 이재환, 유승안으로 이뤄진 팀 내 주요 파워가 대광고 출신인 김재박, 김용달로 중심 이동을 할 시기였다. 그래서 새로 입단한 신입이었지만 별 탈없이 프로생활로 시작할 수 있었다.  첫해는 이해창, 신언호, 이종도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에 밀려 출장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한 해를 보내게 된다. 데뷔 2년째 접어들면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주전 외야수 자리를 꿰차면서 107경기에 출전해 아쉽게 100안타에 1개 모자라는 99개의 안타를 기록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1988년을 기점으로 윤덕규의 전성기는 시작된다.  1990년을 제외하고 6년 연속 3할 타자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그러나 90년에 비록 3할 타자 자리를 잠시 비우게 됐지만 백인천 감독이 이끄는 LG가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시즌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삼성을 제치고 우승반지를 끼게 된다.  그때 윤덕규, 박흥식, 김상훈, 김영직 등 좌타자 라인의 눈부신 활약은 많은 화제를 낳았고, LG 트윈스가 전통적으로 강한 좌타자들을 보유하게 되는 역사가 시작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김동엽 감독이 청룡의 지휘봉을 잡고 있을 때 타격에는 나무랄 데가 없었는데 주루 플레이 실수가 많았다. 김동엽 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주루플레이 실수였다. 그래서 유독 김 감독한테 호되게 야단을 많이 맞은 친구이기도 하다.  그가 이병훈 해설 위원과 외야에서 좌익수로 콤비를 이루던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겠다. 이병훈이 중견수를 볼 때였는데 주자 2루 상황에서 좌중간으로 빠지는 타구를 두 바퀴 반을 구르면서 슬라이딩을 해서 멋들어지게 잡은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중계 플레이를 해야 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공을 좌익수 윤덕규 선수한테 던졌는데 깜짝 놀란 윤덕규 선수가 맞을까봐 피해버렸다. 그래서 2루 주자가 태그업을 해서 아웃 카운트를 더 늘릴 수 있는 상황을 놓쳐버린 황당한 사건이 벌어져 애매하게 윤덕규까지 바보가 된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김재박 라인은 상당히 장기집권을 하게 되지만 90년대 초반 MBC에서 LG로 바뀌는 것을 계기로 91년 윤덕규는 김재박과 함께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된다. 태평양으로 트레이드된 뒤에도 그의 3할 타율은 계속 진행되면서 3년 연속 3할 타자의 자리를 지킨다. 결국 94년 박노준, 김재현과 함께 대망의 골든글러브를 손에 끼게 된다.  1995년 7월21일 그에게 잊지 못할 날이 찾아온다.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경기에서 역대 11번째로 1000안타 기록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1996년 현대 유니콘스가 태평양을 인수하면서 유니폼을 한 번 더 갈아입고 어마어마한 현대 계열사 직원들의 조직적인 몰표의 힘으로 올스타전에 김경기, 정민태, 윤덕규, 이숭용, 박재홍과 함께 뽑히는 영광도 누리게 된다.  물론 팬들로부터 엄청난 욕을 먹으면서 말이다. 그의 타격이 95년부터 하향곡선을 긋기 시작하면서 1997년 마침내 13시즌을 끝으로 선수의 길을 접게 된다. ‘영원한 3할 타자’라는 별명을 뒤로하고 말이다.

2012-05-24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미남 원자탄' 투수 이상윤

선동렬이 전성기를 열기 시작하기 전에 해태 타이거즈의 에이스로 활약한 투수가 바로 이상윤이다. 시속145키로 이상 나가는 강속구로 타자들을 제압해서 그의 별명이 ‘원자탄 투수’이다. 그리고 187 센티미터의 키에 영화배우 뺨치게 잘 생긴 얼굴로 ‘미남 투수’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며 많은 여성 팬들에게 인기를 누렸던 투수였다. 그는 또 전 프로권투 동양챔피온을 지낸 김기수씨의 사위로도 유명하다.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의 주역으로 베스트 10에 뽑힌 해태 타이거즈 초창기의 최고 에이스였다. 한양대 3학년 때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1983년 해태가 잠실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과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8-1로 승리하며 시리즈 전적 4승1무로 꺾고 첫 우승을 차지하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우승 당시 20승을 거두고도 장명부(30승)에게 밀려 다승 부문 2위를 했다. 프로 첫 노히트노런의 주인공인 방수원과는 광주일고 79년 동기생이고 아직도 깨지지 않은 최연소 20승의 기록보유자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도 3번이나 1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에 올랐고,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그는 1923년 창단한 이래 김양중을 비롯해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 등 3명의 메이저리거를 포함해 무수한 스타선수들을 배출해낸 국내 최고의 야구명문 고교 중 하나인 광주일고 투수의 중간 계보를 잇는 선수였다.  그 다음 계보가 이상윤의 바로 2년 후배가 국보급투수 선동렬과 문희수 투수다. 선동렬이 고등학교 시절 존경하던 선배가 이상윤이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이상윤이 있는 한양대로 진학하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하지만 고려대 최남수 감독에게 설득을 당한 아버지의 권유로 갑자기 진로를 바꿔 고려대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이다. 그 만큼 따르던 선배가 이상윤이었다. 본래 그의 포지션은 3루수였다. 그러다 시즌 도중 투수로 전향해서 불같은 강속구를 던져대면서 부산상고의 양상문을 능가하는 최고 투수란 평가를 받게 된다.  그의 모교인 광주일고가 전국대회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건 1949년 광주일고의 전신이었던 광주서중(당시는 고등학교가 없고 중학교가 5년제였음)의 김양중 투수가 등장하면서부터다. 당시 김양중 투수는 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무적함대라 불리던 장태영의 경남중학을 연장접전 끝에 2대 1로 물리치면서 호남 야구의 존재를 보여줬다.  프로야구 초창기만하더라도 호남야구의 비율이 광주일고와 군산상고가 반반씩 차지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광주일고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성과를 이루는데 일조를 한 투수가 이상윤 투수인 것이다. 한국프로야구에서 개막전 완봉은 8번 있는데 1984년에 개막전을 롯데 자이언츠를 홈으로 불러들여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갖게 되었다.  이때 이상윤(1-0)이 롯데 선발 최동원과 피 말리는 완투대결을 벌이며 완봉승을 거두는 쾌거를 올렸다. 이 기록은 프로야구 기록상 8번 밖에 없는 대단한 위업이다. 한국프로야구에 너클볼을 처음으로 시도한 투수도 이상윤이다.  이런 그가 술집에서 폭행을 한 사건으로 야구팬들의 지탄을 받으면서 슬럼프에 빠져 저조한 성적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88년 심기일전하여 16승으로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나 싶더니 이듬해 성적 부진으로 8년간의 화려했던 프로선수 생활을 접고 지도자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는 골프 또한 프로급이다. 그래서 한 때 야구계를 떠나 중국에서 골프장 운영에도 관여하다가 현재는 광주에서 마트 대표로 일하면서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도움을 베풀면서 제2의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가고 있다.

2012-05-17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쌍둥이 곰돌이 구천서·구재서

 프로야구에서 형제가 같은 구단에서 같은 유니폼을 입고 뛴 선수들은 여럿 있었다. 삼미 슈퍼 스타즈에서 활약했던 양승관·양승후 형제 역시 삼미와 청보에서 같이 활약했던 김상기·김동기 형제 등이 있었다. 그러나 쌍둥이 형제가 프로야구에서 그것도 같은 구단에서 플레이를 한 형제간은 구천서·구재서 형제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두 사람은 대구에서 태어나서 중학교까지 경운중학교에서 선수로 뛰다가 청운의 꿈을 안고 새로 창단된 신일고로 둥지를 옮겨 새로운 야구인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신일고는 전 국가대표 2루수 출신인 한동화 감독 밑에서 피나는 훈련 끝에 76년 황금사자기 우승을 시작으로 화랑대기 우승 등 전국대회 최강팀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들 멤버 중에 두 쌍둥이 형제도 이름을 올리게 된다. 두 형제는 걸출한 야구선수를 많이 배출한 그 유명한 81학번 선수인데 대구야구의 몰락을 가져온 주인공이 바로 81학번이란 점도 흥미롭다.  1978년 대구야구 미래의 주역들이 대구를 떠나 서울로 대거 진출하던 때 구천서·구재서는 박흥식과 함께 서울 신일고로, 고 안언학, 주대중이 서울 중앙고로 진학하면서 대구야구가 한 동안 침체기를 겪게 됐다.  구천서는 1981년 선동렬과 함께 세계청소년 대표팀으로 태극마크를 달기도한 장래가 촉망된 선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프로야구가 창단하기 전에 상업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잠시 하다가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OB 베어스 창단 멤버로 지명되어 선수생활을 마칠 때까지 OB맨으로 활약했다.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프로에 입문했는데도 뛰어난 타격과 1루를 뺀 내야 모든 포지션을 소화해낼 정도로 안정감 있는 수비를 펼쳤다.  유격수 유지훤, 3루수 양세종, 2루수 김광수 등 쟁쟁한 선배들과 경쟁하며 프로 원년 OB 우승에 한 몫을 했다. 그 당시 OB는 박철순 외에도 김우열, 윤동균 등 30대에 접어든 국내 최고령 노장들이 중심타선에 포진해서 공격을 이끌었고 신경식과 같이 고졸 실업출신 선수들이 공격과 수비에서 맹위를 떨쳐 어지간히 뒤진 게임은 막판 역전승을 장식하는 등 팀 별칭답게 반달곰의 끈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반면 입단 동기인 쌍둥이 동생 구재서는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과 같이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주로 대타나 대주자로 활약하면서 6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했다.  한번은 앙숙인 삼성과의 시합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삼성 감독 자리를 김영덕 감독에게 빼앗긴 김성근 감독과 이러한 사실을 안 베어스 선수들이 김영덕 감독에게 야유를 보내 것이 화근이 되어 서로가 앙숙이 됐다. 대구 경기에서 양세종이 3루 주자를 견제하는 과정해서 주자의 머리를 치고 말았는데 이 행동이 발단이 되어 벤치 클리어링(Bench Clearing)이 되면서 선수들 간에 주먹이 오가고 삼성 관중도 여기에 동조해 술병을 던져 1루에 있던 구천서는 이마가 찢어지는 애꿎은 부상을 입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 그 당시에는 자주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도 이 두 팀은 별로 사이가 안 좋은 팀으로 알려져 있다.  구천서는 역대 고졸 타자들 가운데 3할대 타율을 최단시간에 올린 선수로도 유명하다. 그는 신일고를 졸업했던 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타율 0.308로 타격 9위까지 올랐다. 만 19살에 3할 타율 고지를 점령한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이승엽도 프로 데뷔 2년 만에 도달할 수 있었던 대기록이다.  82년 구천서는 66경기 출장해서 타율 0.279로 263타석에 들어서서 61안타와 4개의 홈런을 기록하면서 데뷔 첫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동생인 구재서는 16경기에 대주자나 대타로 출전해 3타수1안타 밖에 기록하지 못하면서 아쉬운 한 해를 보냈다.  구천서는 12시즌을 끝으로 반달곰 둥지를 떠나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지금은 한화 이글스에서 코치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는 이제는 프로야구에 남아있는 원년 멤버다.

2012-05-10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한국 최고의 제구력 투수 임호균 (2)

 한국 사람들은 둘 이상 모이면 아래위를 따지고 셋 이상 모이면 편을 가르기를 좋아하고 그 무리 중에 으뜸이 되기를 좋아한다. 그로 인해 많은 부작용과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된다. 그러한 불미스러운 일 중에는 자신이 머리가 되기 위해 상대를 모함해서 설 자리를 빼앗거나 해를 가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야구 현장을 뛰어본 선수이자 기자로서 그 중의 한 사람이 장명부였고 그로 인한 피해자가 임호균이었다고 생각한다. 프로야구 창설 당시 가장 팀 전력이 약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장명부는 선수들에게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러니 자연히 투수들은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선배는 임호균이었고 모두가 그를 형같이 따랐고 연습 때나 불펜에서도 그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다. 그러니 최고참 선수였고 일본프로야구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장명부는 자존심이 무척 상할 수밖에 없었다.  장명부는 이러한 일을 허욱 사장에게 바로 고하고 임호균을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해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영원한 인천 맨이 되고 싶었던 임호균이었다. 그러나 구단은 삼미에서 가장 강한 입김을 가지고 있는 장명부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래서 생긴 사건이 프로야구 최초의 1대 4 트레이드다. 삼미는 임호균을 내주고 롯데에서 우경하, 권두조, 김정수, 박정후를 데려오게 된다. 그 정도로 당시 임호균의 몸값은 대단했었다.  이제 그는 허탈한 심정으로 두 번째로 부산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복수의 칼을 갈면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삼미전만큼은 이를 악물고 던져 7번 선발에서 3번을 내리 완투하는 괴력을 발휘하면서 자신을 버렸던 팀에 시원하게 복수를 했다. 특히나 1984년 5월2일 인천 삼미 전에서 장명부와 10회 완투 접전을 벌인 끝에 4-2로 승리한 건 명승부 가운데 명승부로 꼽힌다.  이 같은 트레이드가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가 되어 롯데 유니폼을 갈아입은 첫해에 최약체 팀이었던 롯데 자이언츠를 최동원과 함께 역투하면서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최동원이 구원투수로 나가면 꼭 루상의 주자를 다 불러들인 다음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이야 그러고 싶어서 그러진 않았겠지만 1승이 아쉬운 무명 투수들에겐 금싸라기 같은 1승이었다. 이런 식으로 구원승을 하면서 선발 투수의 승리를 무산시키는 일이 여러 번 생기게 되자 임호균이 최동원을 불러 이런 이야기까지 했었다. “넌 대선수인데 왜 동료들 승을 자꾸 빼았느냐”고 말이다.  임호균은 롯데에서 3시즌을 뛰고 다시 고향 팀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삼미가 아닌 주인 새로 바뀐 청보 핀토스의 새로운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1986년 부산을 떠나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청보에선 연고지를 대표할 간판이 필요해서 그를 불러들이게 된다. 1987년 또 하나의 기록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8월25일 인천-해태 전에서 73개의 공으로 5대 0 완봉승을 거두며 역대 9이닝 최소투구 완봉승 기록을 세운다. 그날 해태 타순은 백인호, 송일섭, 김봉연, 김성한, 김종모, 한대화, 이순철, 장채근, 서정환이었다.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한다는 타자들을 상대로 73개로 경기를 끝냈다는 믿기지 않는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의 프로야구 전적은 44승56패3 세이브 평균 자책점은 3.32이다. 비록 화려한 기록은 아니지만 아주 빠른 스피드의 볼도 아닌 칼 같은 제구력을 무기로 평균 자책점 3.32를 기록했다는 것은 상대 타자의 수를 간파하면서 얼마나 훌륭한 투구를 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투수들에게 평균 자책점은 승수만큼이나 높이 평가되는 부문이다. 그만큼 상대 팀에게 점수를 내 주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어떤 감독이나 야구 전문가들은 평균 자책점이 낮은 투수를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어쨌든 임호균은 투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제구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투수로 한국야구사에 길이 남을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2-05-03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한국 최고의 제구력 투수 임호균 ①

하늘이 낸 인재를 천재(天才)라고 하고 그 재주를 노력으로 이룬 인재를 수재(秀才)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천재는 타고났다는 표현을 쓴다.   1983년부터 너구리 장명부와 삼미 슈퍼 스타즈에서 투수의 축을 이루면서 화려한 선수 생활을 했던 임호균 선수도 투수의 생명이라고 하는 제구력에서 하늘이 낸 천재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한국 야구에서 임호균을 빼놓고 제구력에 대해 논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할 정도다. 그 뒤를 이어 빙그레 이글스에서 활약하던 이상군 투수을 들 수 있다.   임호균 투수는 인천 태생이지만 인천과 부산을 오가며 야구 인생을 살아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시절 허약한 몸을 단련시키기 위해 시작한 야구가 그의 평생 직업이 될 줄은 자신도 몰랐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공부가 더 좋아 야구를 그만 두려고 했다가 그래도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 그만 두어도 후회가 없지 않겠냐는 작은 아버지의 끈질긴 권유로 다시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팀의 에이스로 자리 잡게 되고 야구명문 인천고등학교에 특기생으로 입학할 정도의 실력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시험을 치르고 입학했다. 이 때부터 임호균은 고교 야구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1974년 고교 3학년 시절 최강으로 꼽히는 대구상고와 휘문고를 상대로 역시 노히트 노런을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기록하는 전대미문의 대기록을 세웠다.   “고등학교 때도 강속구 투수는 아니었다. 키가 170cm 정도로 작아서 체구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다. 그래선지 어릴 적부터 내가 살 길은 강속구가 아니라 타자가 직구를 기다릴 때 커브를 던질 수 있는 영리한 수읽기와 칼 같은 컨트롤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왔다.”   이것이 임호균이 제구력의 달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였다. 그러나 야구라는 것이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로 잰 듯한 볼 컨트롤을 갖고 싶지 않은 투수가 어디 있겠는가?  노력도 중요하지만 타고난 재질이 보태줄 때 기량도 한껏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임호균이 인천고등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 본다. 감독이 하루는 야구하는 친구를 데리고 와서는 “엄청난 물건이 하나 들어왔다”고 하면서 홈 플레이트 위에 박스를 설치해 놓고 직구, 슬라이더, 싱커 위치에 담배에 불을 붙여 한 개피씩 세워 놓았다. 임호균에게 공을 던지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담배는 쓰러뜨리지 않고 불만 껐다고 한다. 그래서 감독 친구가 “인천 야구에도 빛이 뜨는구나”라고 탄성을 질렀다고 하는 조금은 과장된 이야기가 있다.   임호균은 선동렬의 제구력에 실질적인 스승이기도 하다. 대표팀 시절 선동렬은 빠른 볼에 비해 볼 컨트롤이 약했다. 이것이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 대부분의 약점이다. 선동렬이 임호균과 함께 연습을 하면서 임호균이 깜짝쇼를 보여줬다. 임호균이 홈 플레이트 위에 공을 놓고 두 번에 한번은 그 공을 맞추는 것을 보고 선동렬이 그 비법을 전수받아 지금의 선동렬로 태어났다고 그 시절을 회고한다.  비록 고교 시절 전국대회에서 우승기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를 찾는 대학이나 실업팀은 줄을 섰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어려워지자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명문대를 제쳐놓고 당시 최하위 팀이었던 철도청에서 실업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2012-04-26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미스터 MBC 청룡' 김상훈

‘미스터 청룡’이라고 불리며 청룡의 간판타자로 김재박, 이광은과 클린업 트리오로 팀 타선을 이끌었던 1루수 김상훈. 그는 1번 타자 김재박, 2번 김인식에 이어 정교한 타격으로 3번 타자로 MBC 청룡에 이어 LG 트윈스에서 서울 야구의 자존심을 지켰던 선수였다.  1984년 MBC 청룡 입단. 첫 해 75안타 이후 1985년부터 6시즌 연속 100안타 이상을 기록했다. 88년에는 3할5푼4리의 타율로 타격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 여세를 몰아 9번째 시즌을 맞아 프로야구 통산 5번째로1000 안타의 위업을 달성하면서 그는 체격이 큰 타자들의 트레이드마크인 파워풀한 스윙보다 공의 포인트를 정확하게 쳐내는 전형적인 중거리타자로 그래서 홈런보다는 2루타에 더 능한 타자였다.   그 결과 입단 7시즌 만에 통산 100개 2루타를 때려댔다. 신장이 185 센티미터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키였던 김상훈은 구부정한 타격폼과 오른발을 들었다가 나가는 특유의 스윙을 했던 타자였다.   그런 친구가 타격할 때 스윙은 파워풀할 것 같은데 의외로 정제된 스윙을 했다. 깔끔한 외모와는 달리 한 터프(Tough) 하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곧 잘 판정시비로 심판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는 친구였다.   그런 깔끔한 외모로 서울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던 김상훈은 93년 은퇴하기까지 미스터 LG로 사랑 받으면서 LG 트윈스를 대표하는 타자로 이름을 날렸고 90년 MBC 청룡에서 LG 트윈스로 팀 이름을 바꾼 첫 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시즌 1위로 플레이오프에 나가 삼성을 제치고 우승을 한다. 아울러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도 끼게 되는 영광스러운 한해를 보낸다.   그때 이승엽을 길러내서 ‘이승엽의 사부’로 통하는 박흥식과 윤덕규 등 좌타 라인의 눈부신 활약은 많은 화제를 낳았고 지금의 LG 트윈스가 전통적으로 강한 좌타자들을 보유하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동대문상고를 나와 동아대 4번 타자 활약하던 김상훈은 만만치 않았던 선배들인 김용달과 김바위를 밀어내고 팀의 새로운 1루수로 자리를 굳힌다. 기량도 뛰어났지만 어우홍 감독이 부임 전까지 동아대 감독이었던 만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무리를 할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MBC 청룡에 들어오면서 홈구장인 잠실을 의식해서 중장거리 타격폼으로 바꾼 것이 먹혀들었던 것이다.   김상훈은 시즌초반 4할 대의 타력을 보이면서 타격랭킹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중반이후부터 타격폼이 흔들리면서 결국 2할 7푼대로 시즌을 마감한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프로야구의 맛을 알아 가면서 자기 능력을 십분 발휘하기 시작한다.   사실 그 당시 MBC 청룡의 중심타선은 82년 같이 국가 대표팀에서 뛰었던 김재박, 이해창, 이광은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로 짜여져 있었다. 그런 틈에서 3번 타자의 자리를 쟁취해 찬스 메이커 노릇을 톡톡히 해내면서 서두루지 않고 자신의 이미지를 서서히 부각시켜 나갔다.   자신의 체격 조건으로 보거나 대학시절의 실력으로 보거나 충분히 장거리포 타자로 계속 밀고 나갈 수 있었겠지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자기에게 충실하면서 선수생활을 이어 나갔기 때문에 훌륭한 기록들을 남기면서 팬들의 사랑을 오랫동안 받았던 것이다. 물론 정확 하면서 한 방이 있는 선수라면 더 바랄게 없겠지만 '과유불급 (過猶不及)' 이라는 말과 같이 지나치지 않고 자신에게 맞게 선수 생활을 조절해 나가는 것이 본인에게도 좋고 그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팬들에게도 바람직 할 것이다.   이런 김상훈의 선수생활 스타일이 우리에게도 의미를 주지 않을까 생각된다.

201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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